터스턴제일침례교회
 
주님의 기준으로
 설교자 : 서병관 목사
 성경본문 : 마가복음 4장 21-29절
 설교일 : 2014-07-10
어느 스승이 제자들에게 엽전 한 닢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동전 하나로 온 방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사올 수 있겠느냐?” 제자들은 어떻게 그런 물건이 있을까 하며 서로 수군거리기만 하였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제가 사오겠습니다.” 하고는 엽전 한 닢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곧 돌아온 제자의 손에는 양초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불을 붙여 양초를 피우자 온 방안이 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이 빛의 위력입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것은 한 자루의 촛불입니다.

사람들이 등불을 가져오는 이유는, 말 아래나, 침상 아래데 두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높은 곳에 두어 온 집안을 환히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등불로 부르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하였습니다.

빛의 특성은, 감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2절에,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귀신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예수님의 참 모습에 대하여 알아 보았을 때,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왜요? 아직 주님이 하셔야 할 사역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는 약 3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문이 더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1장 45절에,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참 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태어나실때부터, 동방의 박사들이 그 빛을 보고 따라올 정도로,
세상에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단순히 광채가 아니라, 질병으로 고통과 슬픔가운데 있는 자에게는 치유의 빛으로, 귀신에 사로잡혀 어둠의 인생을 사는 자에게는, 자유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감추려 하여도, 그 빛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조금 힘든 부분이지만, 예수님의 능력이면, 전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감추실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알게 될텐데,
왜,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시고, 계속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들을 보여주고 계십니까?
23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주님은, 마음이 돌덩이처럼 굳은 강퍅한 심령에게는, 마치 감추인 것처럼 보이지만,
메시야를 사모하고 갈급한 심령에게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증거들을 계속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오고, 주를 영접하는 자는 자유의 기쁨을,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화)
2차 대전 중 일본군이 필리핀 제도 남양 군도에까지 쳐들어가며 맥아더의 꽁무니를 뒤쫓고 있을 때,
큰 별자리 하나를 포로로 붙잡았다. 이 거물급 미군 포로는 만주에 있는 포로 수용소에 끌려 들어가 갖은 모욕과 학대와 멸시를 당했다.

전쟁이 종결로 접어들자 이 거물급 포로는 지하조직을 통하여 미군의 승리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조인을 전해 들었다. 그는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가슴팍을 대문짝 같이 열어 젖히며 펴 보였다.
그리고는 포로 수용소의 일본군들에게 호령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너희들의 사령관이다. 이제부터는 나의 명령을 따르라."

만주만 해도 벽지라서 본국의 사정을 알아듣기에 굼뜬 포로수용소의 일본군들은 껄껄 웃었다.
그들은 이 거물급 포로가 미쳤다고 했다. 포로 생활의 고통 중에서 정신 이상이 된 거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이 거물급 포로는 진실을 말했고, 이 진실을 정보에 뒤늦은 일본군들은 거짓으로 들었을 따름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진실대로, 포로로 끌려갔던 장군이 명령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40일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온갖 멸시와 학대와 고소를
일삼았던 사단의 행보가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모든 어두움을 밝히시고, 어둠을 정복하시는 크고 강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오셨기에 사단은 과소평가 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지만, 그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권능과 능력은 변함이 없으시고, 잃어버리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과 권세를 스스로 버리셨다. 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우리가 힘과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자랑하는 사람들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15년 생명이 연장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런 히스기야가 정말 살아났는지, 그리고 나라의 국력은 얼마나 되는지 염탐하러온,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히스기야는 금은 보화의 보물 창고들을 보여주면서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사신들은, 더욱 히스기야의 보물 창고에 욕심을 내게 되었고,
결국,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한마디로, 적들에게 너무 귀중한 것들을 자랑함으로, 전쟁을 불러 일으킨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은 너무나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병고치는 능력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다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잡혀가실때에도, 순순히 잡혀가시고,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씌울때에도, 그리고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려도, 모든 것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단이 보기에, 얼마나 자만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 분이 가지신 능력은, 부활에 나타났습니다.
잠깐 원수 갚는 것이 진짜 능력이 아니었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능력이야 말로,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요, 진짜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겉으로 보여진 모습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은, 주님과 함께 동행할 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척도가 있습니다. 이 척도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고 자신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재고 판단할 때 사용하는 도구로 너희도 또한 판단을 받을 것이요 그것보다 더 심하게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를 판단하는 잣대는 부드럽지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는 매우 엄격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그 반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엄격한 잣대를 댔어. 그렇다면 너에게는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하겠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범했을 때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왔을 때도 주님은 이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 여인을 죄인이라 판단하고 죽여야 한다고 했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려 하였지만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주님은 정죄와 심판의 자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잣대로 이 여자를 판단하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자를 보면, 한쪽에는 인치로, 한쪽에는 센티미터를 새겨놓은 자가 있습니다
센티미터로 재면, 숫자가 큽니다. 그러나 반대쪽 인치로 재면, 숫자가 별로 안되빈다.
그것처럼, 어떤 자로 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사랑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면, 저와 여러분도 주님이 오시는 그날,
우리를 동일하게 사랑의 자로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고인이 된 곽규석 목사님이 ‘부메랑의 원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갖고 있기에 서로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자칫 미움과 질시와 갈등 속에서 살기 쉽습니다. 내가 만일 누군가를 저주한다고 했을 때 그 저주는 일차적으로
그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무언가 그가 저주 받을 짓을 당신에게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는 부메랑처럼 반드시 나에게도 돌아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밉고 싫은 사람에게라도 저주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내가 만일 누군가를 위해 축복해준다고 가정합시다.
그 축복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축복해주었을 때 그 축복은 반드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저주나 축복은 부메랑의 원리를 갖고 언제나 그것이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는 진리를 우리 인간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24절에,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하고 했는데, 누구로부터 헤아림을 받는단 말입니까?

눅 6:35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빛으로,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