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스턴제일침례교회
 
공경과 경외함
 설교자 : 서병관 목사
 성경본문 : 말라기 1장 6-14절
 설교일 : 2014-06-24
“말라기” 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성경의 제일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볼 때, 이 책의 저자는 선지자 말라기, 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록된 시대는 언제인가?
1장 8절에 보면,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됩니다.

느헤미야도, 페르시야의 술맡은 관원장으로 있었다가, 성벽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라기서가 기록된 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오기 조금 전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자를, “나의 사자”라고 하면서, 보내신 목적, 그리고 이 글을 기록한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목적이 무엇인가? 본다면,

1. 타락한 제사장들의 잘못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 당한 후, 수많은 지식인, 기술인, 그리고 귀족과 젊은이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고레스 왕이, B.C. 538년 칙령을 내려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 라는 허락을 합니다.
그래서 1차 포로 귀환으로, B.C. 538년에 왕족인 스룹바벨의 인도로, 약 5만명 정도가 귀환하였고,
2차 귀환으로, B.C. 458년에 학사이며 제사장인 에스라를 중심으로 귀환을 했습니다.
또한, 3차 귀환으로, B.C. 445년에, 페르시아 왕의 술맡은 관원장 이었다가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부임한,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귀환하였습니다.

1차, 2차, 3차로, 사람들이 나누어서 귀환하였지만, 그냥 단순히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1차때에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처참하게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렸던 성전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2차때에는, 성전이 건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을 회복되어야, 진정한 회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지만, 그 안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예전부터 우상숭배로, 앗시리아에 멸망했지만,
그러나 남유다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성전을 중심으로
이방신과 우상숭배를 멀리 할 것이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타락하고 백성들이 타락하니까, 결국 예루살렘에 모이던 예배자들이 떠나가고,
우상을 숭배하게 됨으로,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멸망시킨 것 아닙니까?

그래서 2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였던, 에스라는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길은, 회개의 운동과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회복되는
영적 각성 부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말라기서가 쓰여진 연대가, B.C. 45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렇게 에스라가 영적 각성 운동을 노력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스룹바벨의 지도아래 성전은 기본적으로 보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제사장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지가 벌써 70년,
그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수하기에 그들의 힘과 노력을 투자한 시간들까지 본다면,
100년이상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동안 종살이 하고, 광야로 나갔을 때,
그들이 예배 드린다고 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그 앞에서 춤추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러 산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자 두려워했던 것도 있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이 그런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이 각각 직책을 맡아
봉사하게 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방나라에서, 더군다나 바벨론같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서,
100년 이상 그 우상문화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들의 영성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세속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6절에,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그 다음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제사장들의 부족함이 무엇이라고요?
1) 공경하지 않는 것과 2)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경하지 않는 것은,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옛날 말에,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찬물을 마시는 것도, 윗사람에게 드립니다.
그리고 식사를 할 때에도,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윗사람에게 드립니다.
왜요? 공경하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요? 더 조심합니다.
그래서 레위기에 하나님께 드릴 소나 양이나 염소같은 제물을 드릴 때, 어떤 것으로 드리라고요?
흠이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흠이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레위기 22장 22절부터, 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가치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시장에 나가보면, 과일도 농부가 1년동안 비나 우박의 피해없이, 그리고 벌레의 피해 없이,
정말 맛있게 보이고, 조금도 상함이 없는 과일은 최고의 값을 받습니다.
그러나 과일이 크고 맛은 있지만, 조금 벌레를 먹었던지, 아니면, 비나 바람으로 조금 상한 것은,
가격이 반절 이하로 싸게 가치가 매겨질때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무엇이든 최고의 가치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조금도 상함이 없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꾸는 사람이 모든 정성을 다해야만, 그런 가치있는 상품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다는 것은? 하나님은 가장 가치있고 귀한 것을 받으실만한 분이십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싼 것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소만 제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서, 양이나 염소, 또는 비둘기나 곡식으로도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무엇을 드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 어떤 정성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22장 2절에,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정성이 담겨 있는, 제물을 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제사장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드렸다고요?
7절에 더러운 떡이라 함은, 흠이 있는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주일에 헌금을 준비하기 위해서, 구겨진 천원짜리 지폐를 다리미로 펴서
헌금을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제물은, 마음과 정성이 담겨있는 예물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최고의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인생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결국 제사장들이 공경하지 않았던, 기본 이유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에,

여러분,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서 교회에 가지고 왔을 때,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예물을 드리는 사람보다, 속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죽게 하셨습니다.
왜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성령님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행전 5장 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요, 죄를 짓기 쉽고, 불순종하기 쉽습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인들이 강해지고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남자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애굽 왕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너무 건강해서,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벌써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죽이지 못했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왕의 부하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왜 안죽였냐고 협박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사와 왕 보다도, 우리의 육신 뿐만 아니라, 영혼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왕 앞에서도 당당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제사장들도 그렇고,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단지 무서운 분으로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권력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경외하고 섬길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이요, 거룩한 인생이 다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