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스턴제일침례교회
 
나의 증인, 나의 중보자
 설교자 : 서병관 목사
 성경본문 : 욥기 16장 12-22절
 설교일 : 2012-10-31
의학용어 중에 플라시보(Placebo) 효과란 말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없는데 있을 것이라 마음에 기대함으로써 실제로 나타나는 효과를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기대효과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라이트 라는 사람은, 오렌지만한 크기의 종양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의 장액인 크레비오젠이 암에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사에게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의사들은 별 기대 없이 사용했는데, 암덩어리가 눈 녹듯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언론에서, 크레비오젠이라는, 말의 장액이 암에 소용없다는 기사를 읽었고 다시 암이 재발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이제는, 이전보다 두 배나 강한 크레비오젠이라고 말하면서 영양제같은 물을 주사했는데,
다시 건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거나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을 보면, 욥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냥꾼처럼 묘사하면서, 마치 자신은 사냥꾼에게 사냥을 당하듯이 갑작스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궁수들이 자신을 표적으로 여러개의 화살을 쏘아, 마치 벌집이 되듯이 화살을 맞은 것과 같은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슬픔을 상징하는 베옷을 자신의 몸에 꿰매어 사는 것처럼, 항상 슬픔과 탄식으로만 살아가는 인생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큰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 어떻게 보면, 이미 암이 온 몸에 퍼져서
인간의 노력인 의술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정도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욥에게도 플라시보와 같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이 무엇입니까?

1. 자신이 하나님앞에 결백하다는 것이고 또한, 욥의 결백을 증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인생을 보면, 욥이 정말 이런 고난을 받을 만한 큰 죄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욥이 마음으로 지은 죄는 모르지만, 욥의 행동, 그리고 욥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에서는,
우리가 욥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네가 이런 고난과 저주를 받을 만한 죄가 있는지 다시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친구들이라고 있기는 하지만, 욥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친구가 없습니다.
여러분, 힘들 때, 어려울 때, 친구가 왜 필요합니까?
친구나 능력이나 물질이 많아서 친구입니까?
정말 좋은 친구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고, 진심으로 우리의 상황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좋은 친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외로울 수 밖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외롭게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진정한 친구가 있으십니까?
사실, 저도 친구들은 여럿이 있지만, 이심전심처럼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는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외롭지 않습니다. 힘들 때, 함께 기도해주는 중보기도자들과 성도님들이 계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외롭지 않게 고난과 문제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할수록,
세상에서는 외로움을 경험할지 몰라도, 주 안에서나 교회안에서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기도함으로, 결코 외롭지 않는 인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그 증인이 또, 중보자가 되어주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애굽에서 430년동안, 그런 문화에서 종살이를 하였으니,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었겠습니까?

그리고 애굽을 나오자마자, 그들의 믿음이 180도 달라지게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받으러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모세가 빨리 내려오지 않기에,
백성들이,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 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 때,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고,
모세에게 큰 나라를 따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시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중보기도를 드려서, 다행이 백성들이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중보기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실수로 본다면,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입장과 형편에 있는 우리인데,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게 된 것처럼,
욥에게도, 또한, 저와 여러분에게도 중보의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때에도,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면서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21절에, 욥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자신을 변호해 줄 증인이요, 중보자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성령님이, 예수님이,
우리의 큰 죄악을 용서해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임하게 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된 줄로 믿습니다.

플라시보의 효과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믿는 희망이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성령님께, 예수님께 기대하는 희망은 확실한 것이며,
실제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과 신앙에 존재하고 이루어질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증인이요, 중보자가 되시는 주님을 의지함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